한국문화유산답사회 엮음 <<답사여행의 길잡이 14: 경남>>, 돌베개, 2002년 4월 8일 초판 1쇄. 284-295쪽. 특집 “임나일본부설과 가야사”.

임나일본부설과 가야사

김 태 식 (홍익대학교 교수)

목차
1. 임나 문제의 쟁점
2. 임나와 ‘임나일본부’의 성격
3. 전기 가야사의 전개
4. 후기 가야사의 전개
5. 가야의 멸망 원인과 유민의 활약

1. 임나 문제의 쟁점

낙동강 유역에 자리 잡고 있던 가야(加耶)는 고대 문물이 번성하였을 뿐만 아니라 위치상으로 신라와 백제, 그리고 바다 건너 왜국의 중간에 있어서, 가야사에 대한 올바른 이해 없이는 신라와 백제의 국가 성장 과정 및 고대 한일관계사를 제대로 이해할 수 없다. 한국고대사의 이해 수준을 심화시키는 관건 중의 하나는 가야사의 연구에 달려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1970년대 이후 근래의 경남/북 일대에서 풍부하게 쏟아져 나온 토기/철기 등의 고고학적 발굴 성과는 가야 문화에 무지한 우리들을 놀라게 하였다. 이토록 풍부한 문화 능력을 가진 가야가 어째서 변변한 문헌 기록 하나 남기지 못하고 쉽게 멸망하고 말았을까?

일부 고고학자들은 가야 문화에 매료되어 가야를 신라보다 우월한 세력으로 과대 평가하기도 하였다. 그러나 가야를 너무 높이 평가하면 삼국을 통일한 신라 문화의 저력을 무시해야 한다는 난점이 있다. 가야사 연구는 더 이상 소홀히 할 수 없다고 하겠으나, 그렇다고 해서 가야를 과대 평가할 수도 없는 것이다. 그렇다면 가야사의 올바른 이해 방향은 무엇일까?

가야사의 연구가 부진한 근본적인 이유는 이른바 ‘임나일본부설’(任那日本府說)과 관련이 깊다. 일제의 식민사학 이래 당시 일본의 사학자들은 가야의 별칭은 임나(任那)이며, 이 지역은 고대 왜국의 신공황후(神功皇后)가 369년에 군사를 보내 정복한 이후 신라에게 빼앗기는 562년까지 왜 왕권의 통치기관인 임나일본부의 통제 아래 있었다고 하였다. 이 학설은 ‘임나일본부설’ 또는 ‘남한경영론’이라고도 하는 것으로서, 고대 일본의 신공황후 삼한 정벌 설화를 바탕으로 해서 스에마쓰 야스카즈(末松保和)가 1920년대에 정리해낸 것이다.

이 임나일본부설은 이미 일제강점기에 일본사 개설서나 사전류의 영문판(英文版)을 통해 전세계에 소개되었으며, 일제 치하의 우리 민족들도 같은 내용으로 교육받았다. 그렇게 심어진 선입견으로 인해 가야사는 한국고대사 연구자들이 꺼려하고 금기시하는 분야가 되어, 최근까지도 학계에서 거의 연구되지 않았다. 그러나 그동안 가야사나 고대 한일관계사에 대한 이견(異見)이 전혀 없었던 것은 아니고, 오히려 상당히 활발한 가설들이 제기되었다.

그중에는 ① 김해에 있던 기마민족이 4세기 초에 일본으로 건너가 국가를 세운 후 왜한(倭韓) 연합왕조를 경영하였다는 ‘기마민족 정복왕조설’(일본 고고학자 에가미 나미오(江上波夫)가 1949년에 처음 주장)도 있고, ② 4~5세기의 왜(倭)는 모두 한반도에서 건너간 집단 이주민이 원주 왜인(原住倭人)들을 정복하고 일본열도 각지에 건설한 한국 계통 소국이라는 ‘일본열도 내 분국설(分國說)’(북한 사학자 김석형이 1963년에 처음 주장)도 있으며, ③ 임나일본부는 백제의 근초고왕이 가야제국을 군사로써 정벌하여 백제권에 편입시킨 이후 설치한 기관이라는 ‘백제군사령부설’(임나 문제에 대하여 남한 최초로 천관우가 1978년에 주장)도 있다.

그러나 가야사를 주로 외부 세력과의 관계 속에서 파악하고자 한 위의 연구들은 기본적인 한계를 지니고 있다. 즉, 왜나 백제가 가야지역을 장기간에 걸쳐 지배했다면 그들의 문물이 해당 지역에서 다량 발굴되어야 하는데, 20세기 이후 21세기에 들어서까지 100년이 넘게 발굴을 했어도 그런 것은 나오지 않았기 때문이다.

반면에 가야 고분 유적으로 추정되는 것은 기원전 1세기부터 기원후 6세기까지 큰 것만 해도 10여 지역에 걸쳐서 존재한다. 이를 6가야연맹으로 포괄하여 설명할 수는 없으며, 문헌을 면밀하게 분석해볼 때 이른바 ‘6가야연맹’은 나말여초에 일어난 후고구려/후백제와 마찬가지로 신라에 반대하여 일어난 후가야(後加耶)의 성격을 띠는 것에 불과하다.

때문에 임나일본부설이나 6가야연맹설과 같은 기존 설에 구애받지 않고, 그를 극복하는 차원에서 가야의 독자적 발전 과정을 처음부터 다시 정리할 필요가 있다. 임나 문제는 가야사의 독자적 전개 과정과 연관하여 재해석되어야 한다.

2. 임나와 ‘임나일본부’의 성격

임나 문제는 거의 전적으로 <<일본서기>>의 기록에서 비롯된 것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그러나 <<일본서기>>는 사료로 인정할 수 없을 정도의 상당한 문제점을 지니고 있어서, 일본에서도 5세기 이전의 고대사에 대해서는 그 기록을 믿지 않고, 거의 전적으로 중국 계통의 왜인전 기록과 고고학적 연구 성과에 의해서만 설명하고 있는 실정이다.

<광개토왕릉비문>도 초기부터 판독이 잘못된 것이 부분적으로 있고 누군가에 의한 석회 칠 조작이 있었다는 것도 인정되고 있다. 그 비문에 왜군의 존재가 일부 나타나기는 하나, 이는 왜의 남한 지배의 증거가 아니라, 백제 및 가야와의 관련 아래 동원된 것이 고구려에 의하여 과장되었다고 보는 것이 학계의 일반적 해석이다. 또한 한일간 근래 연구 동향에서는 <<일본서기>>의 신공황후 관련 기사를 모두 조작된 전설로 처리하고 있어서 이를 토대로 임나의 성립을 말하는 사람은 없다.

그리하여 일본 사학계에서도 1970년대 후반 이후의 연구 경향은 공통적으로 왜에 의한 가야의 대규모 군사 정벌을 인정하지 않고 있어서, 왜의 군사 진출을 주장하는 경우에라도 가야의 요청에 의한 소규모의 군대 파견을 인정할 뿐이며, 아예 군사 행동이 수반되지 않는 교역이나 외교 교섭만을 상정하기도 한다. 그러나 이처럼 임나 문제에 대한 일본 학계의 최근 연구 동향은 변하고 있으나, 일본 대중 언론이나 초/중등 교육은 고전적인 임나일본부설에서 거의 변한 것 같지 않다.

‘임나’라는 말은 한국 계통의 사료에서는 <<삼국사기>> 강수전, <광개토왕릉비문> 경자년(400)조 기사와 경남 창원 봉림사 〈진경대사탑비문〉에 한 차례씩 나올 뿐이고, 중국 계통의 사료에서는 이른바 ‘왜 5왕’의 자칭 작호에 몇 차례 나올 뿐이다. <광개토왕릉비문>에 나오는 ‘임나가라’(任那加羅)에 대해서는 후술하겠지만, 나머지 ‘임나’ 용례는 모두 일본 측의 것이거나 또는 그에 영향을 받은 표현이다. <<일본서기>>에 수백 번 나오는 ‘임나’라는 말의 용례를 조사해볼 때, 그 가리키는 범위가 매우 넓어서 경상남/북도의 상당한 지역뿐만 아니라 충남 및 전라남/북도 지역을 가리키기도 한다.

사료에 따라 임나의 의미도 달라서, 경상남/북도 지역의 임나는 그 안에 현지 세력에 의한 여러 독립 소국들이 있어서 그 땅의 영유 문제에 대하여 왜왕이 관여한다는 관념이 없다. 한반도 경상남/북도 지역의 임나는 왜국을 흠모하여 국명까지 왜왕의 이름을 따라 고칠 정도로 왜와 친근한 나라이고, 이것이 왜 측에서 보는 임나라는 개념의 본질인 듯하다. 일본식으로 매우 편향되어 있기는 하지만, 이러한 관념은 가야연맹의 역사적 실체를 어느 정도 반영하고 있다.

반면에 충남 및 전라남/북도 지역의 임나는 현지 세력에 대한 설명이 거의 없는 상태에서 그 땅의 영유 문제를 왜왕이 마음대로 결정할 수 있고 그곳의 일부에는 왜인들이 거주하는 특별한 행정구역이 있는 것처럼 되어 있다. 이 지역이 임나라고 불리고, 이는 원래 왜왕의 직할지이고 그곳에 왜왕이 파견한 관리들이 가서 주재했다는 관념은 이 지역 출신 이주민들의 주장과 관련이 있을 것이다. 즉, 임나에 대한 후자의 관념은 역사적 사실과는 관련 없이, 기치다노 무라지(吉田連) 가계 전승처럼 후대에 왜지로 건너간 일부 백제인들의 현지 적응과 관련된 소산물이다.

한편 ‘임나일본부’라는 용어는 <<일본서기>>의 541년부터 552년까지의 기록에 5회 나올 뿐이고, 그 사이에 ‘일본부’라고만 기록된 것도 30회 나오며, 그것은 함안의 안라국에 있었던 것으로 나온다. <<일본서기>>에 나오는 임나일본부에 대한 언급은 그것뿐인데, 기존의 임나일본부설에서는 이를 시간적으로 공간적으로 지나치게 확대 해석했던 것이다. 6세기 중엽의 안라에 있었던 ‘임나일본부’는 그 실체가 인정되나, 그 문제는 분열상을 보이던 가야 말기의 정치 상황과 관련하여 해석되어야 한다.

<<일본서기>>의 사료를 보면, 신라나 백제로 가는 왜국 사신이 가야의 해안에 닿자 임나일본부의 관리들이 나가 그 국서의 내용이 무엇인가를 묻고 있는데, 왜의 사신들은 신라왕 또는 백제왕에게 가서 들으라면서 배척하고 있는 내용이 있다. 임나일본부가 남한 경영을 위한 왜의 파견기관이거나 왜왕의 견해를 전달하는 사신들의 객관(客館)이었다면, 그런 일이 일어날 수는 없을 것이다. 임나일본부의 관리들은 왜인 계통의 인물들이었지만, 안라를 비롯한 가야연맹을 위하여 일하고 있었다.

530년대 이후는 가야연맹이 주위의 신라와 백제의 복속 압력을 받아 맹주국인 대가야의 영도력이 흔들리던 시기였다. 그런 기회를 맞이하여 가야연맹의 제2인자였던 안라국은 왜와의 교역에 있어서 유리한 입지조건을 차지하고 있는 이점을 살려 자신을 중심으로 한 중앙집권 체제를 도모하기 위해 이를 운영하였던 것이다.

그런데 ‘일본’(日本)이라는 국명은 7세기 중엽 이후에 성립된 것이므로 6세기 전반에 ‘일본부’(日本府)라는 명칭은 있을 수도 없다. 그러므로 ‘왜의 임나 지배’라는 선입견이 들어 있는 ‘임나일본부’라는 용어는 폐기하고, 앞으로는 ‘안라에 있던 안라의 왜인 신하들이 일을 보던 곳’이라는 관점에서 ‘안라왜신관’(安羅倭臣館)이라는 이름으로 고쳐 부르는 것이 타당할 것이다. 그러나 550년을 전후하여 이 기구가 백제의 압력으로 해체되고 성격이 변모되면서 가야는 멸망에 한걸음 다가서게 되었다.

6세기 중엽의 안라왜신관은 외부적으로는 왜국에서 파견되어온 사신들이 머무는 객관인 것처럼 표방되고 있으나, 실제로는 안라국에 있던 대왜(對倭) 교역 관계 왜신들이 머무르던 곳에 지나지 않으며, 이들은 왜인이라고 하더라도 본질적으로 안라왕을 위하여 일하던 안라국의 신하였던 것이다.

그러므로 안라왜신관의 존재를 근거로 해서 가야연맹의 독립성을 훼손할 수는 없다. 이를 근본적으로 해명하기 위해서는 가야제국이 장기간에 걸쳐 백제나 왜의 복속 상태에 빠진 적 없이 600여 년간에 걸쳐 독립적으로 발전해온 역사를 정립해야 한다.

3. 전기 가야사의 전개

4. 후기 가야사의 전개

5. 가야의 멸망 원인과 유민의 활약

가야연맹은 초기에 김해 가야국이 중심이 되어 철기 생산을 기반으로 한 해운 교역을 주로 함으로써 신라를 능가할 정도의 문화 능력을 갖추고 있었으나 백제나 신라와 달리 400년경에 고구려의 공격을 받아 그 문화 중심지가 몰락하였는데, 이것이 가야연맹 멸망의 일차적 원인이었다. 그후 가야연맹은 문화의 중심과 주체 세력을 고령 대가야로 옮겨 다시 발전하기 시작하였다. 그러나 일차 몰락의 후유증으로 백제와 신라 등 주변 지역에 비하여 중앙집권체제의 마련이 상대적으로 늦어져서 대외적인 문제를 효과적으로 대처해나갈 수 없었으니, 이것이 멸망의 결정적인 원인이었다.

가야연맹제국은 백제나 왜의 복속 상태에 빠진 적 없이 600여 년에 걸쳐 발전하였고, 멸망 후 그들의 힘은 신라에 합쳐져 삼국 통일의 원동력으로 작용하였다. 금관가야의 후손인 김유신(金庾信)이 신라 왕실의 김춘추와 함께 삼국 통일의 위업을 달성한 것은 너무도 유명한 일이다.

그뿐만 아니라 신라가 삼국 통일을 하는 데 있어서 기반이 되었던 6세기 중엽의 한강 유역 점령 과정에서도 가야의 후예들은 많은 기여를 하였다. 특히 금관국 마지막 왕인 구형왕의 아들 노종(奴宗=弩里夫=內禮夫智=世宗)과 무력(武力), 대가야의 마지막 왕인 도설지(道設智=도設智=都設智) 등은 신라 장군으로서 활약이 많았다.

신라의 발전은 오로지 자신들의 힘으로 이룩한 것이 아니라 가야의 문화와 인물들을 흡수하면서 그들과의 협조 아래 이루어진 것이다. 즉, 가야는 멸망으로 끝난 것이 아니라 신라의 역사를 통하여 그 속에서 살아 숨쉬고 있는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신라 문무왕은 김해에 금관가야의 시조인 수로왕의 능을 정비해준 것이며, 도설지왕의 후손인 순응(順應)은 802년에 애장왕의 조모 성목왕후의 후원을 받아 해인사를 창건하였던 것이다. 해인사와 가까운 월광사터에는 대가야의 시조인 정견모주(正見母主)와 마지막 왕인 월광태자(月光太子)에 관련된 유적과 설화가 전해오고 있다.